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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간 불이 네모난 모양으로 켜졌다. 다들 그에 분주하게 준비하는 모습이었지만 찬열은 에구구, 소리를 내며 의자에 간신히 앉았다. 이번 일주일은 유독 더 고되구나, 읊으며 뜨뜻한 커피를 쥐었다. 가만 앉아있기만 해도 몸이 쑤시는 기분이었다. 폭신한 의자에 눕듯이 기댄 찬열은 잔잔히 흘러나오는 노래에 눈을 감았다. 라디오의 오프닝이었다.

 

[안녕하세요, 청취자 여러분. 서울엔 며칠 뒤 비가 내린다는 소식이 들려오고 있는데요. 그래서인지 오늘따라 하늘이 무척 흐려 보이네요. 여러분이 바라본 하늘은 어땠나요? 흐린 하늘만 보셨을지, 오히려 맑은 하늘을 보셨을지. 아니면 하늘 한번 볼 시간도 없이 바쁜 하루를 보내셨을지도 모르겠네요.]

 

종대의 목소리가 포근한 음성으로 낮게 울렸다. 맞아, 비가 온다고 했지. 작가들끼리 모여 대본을 수정한 지가 얼마 지나지도 않았는데 제가 고친 부분이 하나도 기억나질 않았다. 머리가 멍한 것이, 그 속이 베이지 색의 아무런 무늬도 글자도 없는 구겨진 종이로 이루어진 기분이었다. 그렇게 느끼자니 더욱더 아무런 생각을 하고 싶지가 않았다. 문제가 생기면 일 잘하는 제 식구들이 알려주겠지, 생각하며 찬열은 감은 눈을 뜰 생각을 하지 못했다.

흐리고 꿉꿉한 바깥 날씨와 다르게 포근한 공기가 스튜디오 안을 가득 감싸고 있었다. 아직 틀고 있는 히터 덕분인지, 종대의 목소리 덕분인지 분간이 잘 가지 않았다. 디제이로 데려온 종대가 잘 해주어 고맙다는 생각을 문득 했다. 새벽이 다가오는 시간, 바깥은 공기가 차갑겠지 생각을 하며. 찬열은 훈훈한 공기에 잠이 오는 것을 참으려 눈두덩이 위를 꾹, 세게 문질렀다. 그러고 보니 오늘은 하늘 한번 보지 못한 것 같다. 매일 맑은 하늘을 두근거리는 가슴으로 바라보는 것을 습관처럼 하더니 어느 새부터인가, 땅을 바라보며 걷기에도 모자랄 만큼. 앞만 보기도 바쁜 하루들을 보내왔다. 그래 봤자 오늘의 하늘은 잔뜩 흐렸겠지 생각하며 스스로를 다독인 찬열이었다.

 

[적어도 다양한 장소에 있는 우리에게는 보이지 않는 곳, 구름 한 층이 가린 위의 그곳은 여전히. 별이 제 명을, 몫을 다하기 위해 빛나고 있을 겁니다. 비슷하게, 아주 행운이 따랐을, 좋은 하루였을 수도 있고. 저기압의 하늘에 기분도 따라 저기압이 되어 마냥 좋지만은 않은 하루가 되었을지도 모를 이 하루 동안, 여러분은 여전히. 어떤 일을 하고 어떤 사람이 되었든 간에, 당신의 몫을 해내고, 빛나고 있었을 거란 사실을. 알아주셨으면 좋겠다는 이야기를 하면서……]

자신이 이런 문구도 썼었나, 반쯤 뜬 눈으로 생각했다. 생각이 나지 않았다. 습관적으로, 기계적으로, 위로의 말을 써 내리는 자신이라 그럴 만도 하지. 읊조리며 작게 끄덕였다. 아기 작가들은 그런 저를 보며 오늘도 입을 벌리고 멍하니 쳐다봤을 테지만, 저가 자판을 붙잡고 지낸 시간들을 생각하면 아무것도 아닐 것이었다. 하루에 몇십, 몇백 개의 문장을 쳐왔는지 모르겠다. 그 정도면 문장이 자동적으로, 어떠한 생각도 거치지 않고, 자연스럽게 나오는 것은 당연했다. 매일이 반복되는 삶의 연속이었다. 매일 똑같고, 칙칙하고, 어떠한 빛도 찾아볼 수 없는.

그러나, 어쩌면. 그 사이의 시간 동안 저도 모르는 사이에. 스스로 빛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찬열은 작게 웃어보았다.

 

[…오늘도 시시콜콜한 이야기, 시작합니다.]

곧 있어 쏟아져 내릴 비가 다가오는 막바지, 봄이었다.

 

 

 

시시콜콜한 이야기

w. 원 war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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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열이 이끄는 이 프로그램은, 알게 모르게 참 유명해졌다. 가끔가다 방송국 안을 바삐 돌아다니던 그에게 이름 모를 낯선 이들이 ‘잘 듣고 있어요!’ 말 걸어올 정도였으니. 이 정도면 뭐. 꽤 인기 있나 보군, 생각하며 찬열은 작게 수긍했다. 매일 바쁘게 살다 보니 별 탈 없이 이때까지 잘 이어온 것만 생각해 주변의 반응이 어떤지 뭔지, 잘 생각해보지 못한 탓이었다. 물론 다른 작가들이 시청자 의견 게시판을 훑으며 좋다는 얘기뿐이라는 말을 해올 때가 대다수였으며 그 게시글 수가 계속해서 늘어나고 있다는 사실도 보면 인기가 늘긴 했던 것 같다는 생각이었다. 그동안 너무 아무것도 몰랐나, 싶지만서도. 메인 작가로서 총체적인 흐름을 책임지고, 커다란 이야기를 쓰는 만큼 다른 것은 신경 쓸 새 없이 바쁘고 정신없는 하루를 보내느라 비실비실한 모습에 더해 무덤덤한 태도가 생긴 것은 어쩌면 당연했다. 뭐 잘 되고 있으면 되었다, 그런 생각을 했다.

사실은, 어쩌면. 다른 것은 신경 쓰고 싶지 않았기 때문도 있었다. 그가 제 이야기들을 담을 이 프로에서 원하던 것은 딱 몇 가지. 일상적인 이야기, 부드러운 분위기. 어울리는 좋은 노래들. 정말 이것뿐이어서. 그리고 그 원하던 것들을 잘 이루어왔고, 매일 나쁘지 않은 흐름을 했기에. 딱히 다른 것에 신경 쓰고 싶지 않았던 점도 있어서 그랬을 것이 분명했다. 더이상은 무언가 저를 흔드는 것이 없었으면 하는 마음에 다른 모든 것을 차단한 자신의 탓이겠지, 그렇게 생각하고 마는 찬열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시시콜콜한 이야기가 그냥 인기가 생긴 것만은 아니고. 동성애에 관한 이야기를 담아서 이 정도로 유명해진 것이리라. 꽤나 솔직하고 담백하게 모든 사랑에 관한 이야기들을 담고 싶었기에 찬열은 자신의, 또는 자신의 지인 이야기를 맘껏 부을 수밖에 없었다. 덤덤하게 아픈 대화를 나누듯 이야기를 써 내려갔고, 담담하고 다정한 목소리의 DJ까지 더해지니 반응이 꽤 괜찮았다. 이후론 그 누가 영업이라도 뛰었는지, ‘시시콜콜’이라는 애칭을 얻은 그의 이야기들은 ‘새벽에 선 잠드는 사람들을 위한 프로’라는 또 다른 이름을 얻었다. 그 사실을 알았을 적에 찬열은 나쁘진 않네, 속으로 생각하며 쑥스럽게 제 목 뒤만 긁었던 것 같다.

이후로 매번 익명으로 받던 사연의 수가 점차 늘면서 그와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친근감을 강조하던 ‘시시콜콜’은 어느새 요새의 트렌드니 뭐니 하던. 공감과 이해의 시간을 가지는 힐링 프로로 꽤나 인기를 끌게 되었다. 찬열의 말대로, 나쁘지 않은 성과를 거둔 것이었다.

 

그 누가 상상조차 할 수 있었을까. 게이로서, 그저 남들과 똑같이 바쁜 일상을 살아가는 한 사람으로서, 자신의 이야기를 써 내려 갔는데. 그뿐이었는데. 어쩌면 용납받지도 못할 거란 생각에 좌절한 날들도 있었는데. 어느새 인정도 받고 인기가 좋아졌고 그의 이야기들과 사연을 모아 책을 만드는 게 어떠냐는 제안까지 받아왔으니. 그만큼 참 사랑받아왔구나. 나의 이야기가 꽤 괜찮았구나. 찬열은 스스로를 다독일 수 있었다.


일 년 정도 된 시시콜콜에서, 아직 프로의 규모도 사람들도 작고 인기가 이 정도는 아니었지, 할 시절에. 그 초반엔 사연들 대부분 찬열이 골라온 것이 많았고, 그만큼 사연도 답변도 찬열과 닮은 구석이 있는 이야기들이 많았다. 어느 청취자들은 그 중 인상적인 사연과 답변으로 이런 것을 꼽기도 했다.

 

[익명으로 온 사연입니다. ……'장거리 연애를 했습니다. 몇 년 전 이야기지만 말이죠. 그 사람과 저는 8살이라는 적지 않은 나이 차이가 있어요. 제가 학생일 때부터 봐왔으니까 제가 커서도 참 어리게 느껴졌을 거라는 생각이에요. 그런저런 갈등들을 이겨내려 저는 온 힘을 다해서 사랑했는데. 그 사람한테는 그저 어린애의 장난 같은 거라고 생각됐나 봐요. 여자 대 여자라는 점까지 더해, 더 그랬겠죠. 저는 그 사람이 여자를 좋아하는 여자라서가 아니라, 그저 그 사람이어서. 그 사람이 좋아서. 좋아했는데 말이죠. 이제야 진솔하게 얘기하는 것이지만요. 제게 짧은 메일로 이별을 통보한 그 사람의 소식이, 얼마 전 오랜만에 제 귀에 들어왔어요. 새로운 인연을 만났다고 하더라고요. 그 소식을 듣고 저도 모르게 웃었어요. 속상하고 원망스럽고 분통하지 않았어요. 그 뒤로 자꾸만 스스로에게 의문이 드네요. 제가 미련이 없던 걸까요? …저는 왜 웃었을까요. 스스로 답을 내릴 수가 없었어요…….']

문장도 제대로 못 마칠 정도로 고민하는 기색의 말에, DJ의 목소리를 타고 흘러온 답변은 이런 것이었다.

 

[어쩌면 익명님은 답을 알았을지도… 모르겠네요. 하지만 일일이 답을 내리려 하지 말라는 말씀드리고 싶어요. 몰라도 돼요. 답을 내리지 않아도 돼요. 익명님이 한 사랑도 그래요. 그 사랑이 절절한 사랑이었든, 어린 나이에 했던 치기 어린 사랑이었든, 무엇이 됐든 간에 굳이 명명하지 않아도 돼요. 그게 무어든, 사랑은 사랑이니까요.

그게 어떤 세세한 감정이었는지, 어떠한 사랑이었는지. 명확하지 않아도 돼요. 흘러가듯 보내도 돼요. 그저 시시콜콜한 이 이야기들처럼…….]

 

그게 무어든, 어찌 되었든. 사랑은 사랑이니까. 그저, 사랑이니까.

찬열은 하얀색 화면을 채운 사연을 바라보며 멍하니 그 문장만 중얼거리던 그 날을 떠올렸다. 답변을 써 내리며 찬열은, 저도 모르게 눈물을 뚝 떨궜던가. 아니면 엉엉 울고 말았나. 잘 모르겠지만. 여전히 그의 머릿속에 남은 것은 확실한 문장 하나였다. ‘사랑은 사랑이다.’

이런 ‘시시콜콜’의, 프로그램의 캐릭터를 잡아준 계기 중 하나였던 이 코멘트는 ‘시시콜콜’의, 찬열의 일생을 바꾼 계기 중 하나가 되었다. 찬열은 자신의 이야기와 그를 들어주는 사람들에게서 많은 것을 배웠다고. 그렇게 느꼈다. 어쩌면 힐링을 한 것은 저를 애청자라고 칭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자신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애정이 깊어졌다.

 

1년이 간신히 지난 지금, 가끔 사연이 부족하다 싶을 땐 초창기의 이야기를 다시 들려주는 시간을 갖기도 했다. 책의 좋아하는 구절을 곱씹듯, 애청자 중 여럿은 좋아하는 에피소드를 여러 번 듣는 것을 선호했다. 그 대부분이 찬열의 이야기였고. 그것은. 두려움에 말하지 못한 이야기. 누구나 공감하는, 누구에게나 있었을 법한, 그런 뻔한 이야기.

그러나 잊지 못하는. 그런 이야기.


‘찬열아.’
‘……형,’ 

야경이 잘 보이는 집. 새벽 두 시가 넘어 집에 들어와 가만 그 한적한 바깥을 내려다보던 찬열은. 익숙하게 두 목소리가 제 머릿속을 스치는 것에 순간 숨을 멈추었다. 그에게 아직 남은, 잊지 못한 이야기. 여전히 사랑인 이야기.

10년이 넘은 지금도. 찬열은 여전히, 시시콜콜하고 초라하기만 한 자신의 이야기 속에서 살고 있었다.

 




작년 여름에 풀었던 이야기 중 하나인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들고 왔습니다.
기억해주시는 분들이 계실지 모르겠어요.

라디오작가 찬X카페사장 백으로 오랜 짝사랑 이야기입니다

썰을 글로 바꾸는 과정은 처음이라 정신 없고 모자란 부분이 많습니다
그래도 읽어주시고 즐겨주신다면 참 감사하겠습니다

좋은 하루 보내세요 오늘도


글 쓰는 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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